사탕껍질사랑(2024-)

 

사랑.

많은 이들은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사랑이란 개념에 대해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단어를 말하지만 과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알고 보면 다 다르게 얘기되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재정의하고 마음속에 제각기 다른 모양의 사랑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 사랑엔 공통된 느낌, 실체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들 깊은 마음 속에서 모두가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통의 느낌을 아는 것 같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에, 노래에, 영화에 대중은 함께 울고 웃는다.

하지만 결국 다시 질문하게 된다.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정의할 수 없는 동시에 이미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는 개념인걸 알지만, 그리고 그 수많은 정의는 꽤나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내겐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의심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맞을까? 틀린 사랑도 있을까? 틀린 사랑은 몰라도 열렬한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적은 있다. 나는 이런 경우를 사탕껍질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랑을 하고 있다고 오래간 스스로를 오해했다. 그건 사랑이라는 껍데기로 덧씌워진 인정욕구, 외로움, 불안함, 우쭐함, 호기심, 경외심, 허세였다. 뭐가됐건 욕망이라는 사탕 위에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덧씌웠으니 사랑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확실히 말하건대 그것의 정체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처럼 보였던, 사랑으로 착각했던 다른 감정이었다. 타인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내가,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해 인정받기 위해 행동해왔던 내가 사랑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을까?

사랑에 대해 열띈 목소리를 내던 내 위치는 그렇게 격하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먼저 알기로. 즉, 사랑이란 개념과 싸우기 전에 제대로 사랑을 하기로. 그런데 ‘사랑을 한다’라는 말이 이상하다. 사랑은 목적어가 아닌 상태동사이기 때문이다. 목적어 자리에 위치할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상에게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는 순간, 나의 진짜 사랑은 시작되는 것일테다. 다짜고짜 대상없는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언젠가 다가올 사랑의 순간을 위해 존재를 존재 자체로 응시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대상을 내 욕구, 불안, 호기심, 경외를 투영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기로. 오롯이 상대의 존재성만을 인식하기로. 모든 것이 도구화된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작해보겠다.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기.

1. 모두가 각자의 사랑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여타의 욕망을 체에 걸러낸 뒤, 아주 좁고 좁은, 보수적인 의미의 사랑을 말해보고 싶다. 순수한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욕망을 걸러내고 난 뒤 그 무엇이 존재하기나 할까?

2. 이 시도는 제대로 응시하기에 대한 기록이 될 터이다.

 

<드로잉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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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모든 그림은 인물 없이 옷만이 놓여있다. 인물의 흔적만이 있는 옷이다. 옷의 불규칙한 주름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존재를 바라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표정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면 옷은 더 개인적이고 은밀해 쉬이 알아차릴 수 없는 틈새의 표지다. 그러니까 팔이 휘어진 방향이나 어깨의 높낮이, 몸짓, 그로 인해 만들어진 옷의 주름, 차림새 같은 것들.

과거에 자리한 사진첩 속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순간에 멈춰선 그들을 오랫동안 관찰한다. 보이는 모습 너머 옷의 주름 안에 있는 존재와 마주한다. 꼿꼿이 서 있거나, 어깨를 내리거나, 웅크리고 있는 존재들. 카메라 반대편에 서 있던 나는 당신을 제대로 보고 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