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통을 자기 밖으로 퍼뜨리려는 성향. 너무 약해서 타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도 못할 때, 인간은 자기 안의 우주의 표상에 해를 끼친다. 그럴 때는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이 모욕이 된다.
20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빈자리를 견디기,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 쪽에 있다.
인간은 아주 짧은 섬광 같은 순간에만 세상의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다. 정지의 순간, 관조의 순간, 순수 직관의 순간, 정신적 빈자리의 순간, 도덕적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자연에 이를 수 있다.
22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불행을 겪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위안이 있어서는 안된다. 위안을 생각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형용할 길 없는 위안이 내려온다.
24
빈자리를 채우고 고뇌를 달래주는 믿음들을 물리칠 것. 불멸성에 대한 믿음, 죄의 효용성(“죄조차도”)에 대한 믿음.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는 믿음. 한마디로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으려 하는 위안들을 물리칠 것. …사랑은 위안이 아니다. 사랑은 빛이다.
내가 깨달은 것. 그날 나는 빛을 봤고 어렴풋이 느끼기에 그건 사랑이었던 것 같다. 신은 위안이 아니며 믿음도 아니었다는 글을 보고 내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말할 수 있나? 충격에 빠졌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의 집착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가 세상의 사물들 속에 옮겨놓은 자아의 실재이다. 결코 외적인 실재가 아니다. 외적인 실재는 우리가 집착을 완전히 벗어나야 비로소 자각할 수 있다. 실오라기만큼 남은 집착도 여전히 집착이다.
나는 이곳 외의 세계가 존재함을 느꼈다. 그걸 체험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선명히 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모든 연결을 강하게 느꼈고 정신적인 영역이 분명 존재함을 실감했다.
26
우리가 사랑하지만 지금 눈앞에 없는 물건 혹은 사람을 떠올릴 때는 그 물건이 부서졌다고 혹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상상할 것. 이런 생각 때문에 실재라는 느낌이 없어지지 않길. 오히려 더 강해지길.
사랑도 집착일까 사랑은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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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대상에서 에너지를 떼어놓기 위해 욕망의 근원으로 내려갈 것. 그곳에서 욕망은 에너지로서 진짜다. 대상이 가짜다. 하지만 욕망과 대상이 분리될 때 영혼은 형용하기 힘든 아픔을 겪는다.
우리 안으로 내려가보면, 지금 욕망하는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마지막 문장을 오래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욕망의 대상을 제외하고 소유하고 있음. 예컨대, (이후 재구성)
음식을 먹길 욕망하는 경우, 음식물은 없지만 굶주림은 실재한다. 고통이나 빈자리는 그런 경우에 욕망의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비실재성의 장막을 걷어내보면, 대상들이 그런 방식으로 주어졌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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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은 위안이나 고통의 영역을 넘어선다. 지팡이나 다른 연장의 끝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원래의 촉각과 다르듯이, 참된 행복은 다른 감각으로 감지된다. 그 다른 감각을 지니려면 몸과 영혼을 다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 우리의 감각 능력 안의 빈자리가 우리를 그 감각 능력 너머로 데려가준다.
결국 모든 것은 통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