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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 가운데서 부유한다. 정보과잉 사회는 그 속에서 ‘스토리 텔링’을 외친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SNS에 찰나에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스토리는 정보다. 서사는삶 그 자체이며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띈다. 곧 사라져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일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 의 끝은 서사 없는 텅빈 삶이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현재를 과거와 연결하며 맥락을 이어 나가고 있는가? 존재를 망각 한 채 자신의 아우라를 외면하고 무작위성에 휩쓸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건 삶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에서 또 다른 문제들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연약하고 적나라한 생존이다. 서사 속에 존재의 닻을 내리고 싶다면 코앞의 이슈를 좇는 데서 한발짝 벗어나 먼거리에서 시선을 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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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는 사람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설명 하지 않는다. 이야기 하기 의 예술은 정보를 내 주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전반을 완성 한다.” 내 주지 않는 정보, 즉 빠져 있는 설명이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정보는 무관격성. 이야기는 원격성의 특징을 가짐.
“기록이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근접성이 발견 한 현상이며,아우라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원격 성이 발견한 현상이다.”아우라는 서사적이다. 아우라는 먼 것으로 가득 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보는 원격성을 버림으로써 세계를 탈 아우라화 하고 탈 신비 화 한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전시 할 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 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 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보인다. 1번 인식 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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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곧 정보와 데이터의 형식으로 변환된다. 우리는 현실을 정보로 받아들이거나 정보를 통해 인식한다. 현실의 정보화는 직접적인 현존 경험을 약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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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지배는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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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힘을 자유와 혼동한다. 영화 아노말리사는 스마트한 지배 논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이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진정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신자유주의적인 동일성의 지옥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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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에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사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Ch.3 설명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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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하는 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행복은 구원과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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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역시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파편화하는 근대의 시간적 위축증에 단호히 반대하는 글을 쓴다. 근대의 삶의 파편화와 위축은 현 존재가 자기의 실존 안으로 출생, 사망, 그리고 그 사이에 모든 시간을 운명으로 포함시키는 과정인 전체 실종의 신장성으로 대응된다. 인간은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순간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출생과 사망 사이의 전체 시간에 걸쳐 있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간적 폭을 수축시킬 수 있는 근력이 자기로부터 나와야 한다. 존재의 지속성은 자기의 지속성에 의해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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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깊이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셀카도 찰나의 사진이다. 기억 매체로서의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일시적 시각 정보다. 아날로그 사진과 달리 셀카는 짧은 인식 후 영원히 사라진다.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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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사건들은 페북에서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야기든 또는 기억된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이에 틈이 존재한다. 반면 디지털 플랫폼은 빈틈없는 삶의 기록화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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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저 노는 중일 뿐이라고만 믿는 포노 사피엔스는 실제로는 완전히 착취당하고 제어당하고 있는 것이다. 놀이터로서의 스마트폰은 디지털 파놉티콘임이 드러났다. 이야기는 의식적 작업을 전제한다. 그러나 데이터와 정보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성찰적 층위로 가기 전의 행위를 제어하는 것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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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양이 아닌 질이기 때문에 숫자가 아닌 이야기만인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나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 삶은 정량화가 가능한 사건들로는 이야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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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에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뿐이다.
사진에 있어서 든 생각: 사진이 기록이 아닌 기억이 될 때, 설명적 사진이 아닌 재현적 사진이 될 때, 그럴 때는 언제일까? 사진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일 것이다. 아날로그 필름은 방식의 특성상 의미를 부여하기 쉽다. 결과물을 바로 확인하지 못하고, 즉시 결과물을 삭제할 수도 없으며(이미 필름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찍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한 장 한 장을 공들여 찍는다. 그렇다면 디지털 사진은 어떻게 재현적이 될 수 있을까? 즉, 어떤 디지털 사진이 의미를 가지게 될까? 존버거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상황을 포착해 사건을 담는다면 그 사진은 서사적 내면성을 가진다.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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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세상을 유의미하게 보는 힘이 있다. 인간은 삶을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다.
일기를 쓰면서 사건(정보)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서 계속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다시 한 번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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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없는 삶은 그저 첨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면은 바뀌고 사람들은 오고 가고, 그것이 다다 시작점은 없다. 오늘은 어제 외워지는 날이며, 의미도 지성도 없고 멈춤 없는 연속적 나열에 불과하다. 그저 시간과 나를 나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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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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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별과 벗음은 투명성, 정보 소통의 차가운 외설로 확대된다.정부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베일로 감싸기는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설명하지 않고 재현한다. 그게 이야기하기의 예술이다. 반면 정보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에로티시즘, 정보는 포르노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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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탈신비화되면 모든 세계관계가 인과성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인과성은 여러 관계성 형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재화는 모든 것을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전체화는 세계 빈곤과 경험 빈곤을 초래한다. 신비롭거나 시적인 세계는 인과성을 벗어나 인간과 사물의 깊은 공감으로 연결된 관계다. “내가 흐르는 강물 강의 물결을 숙연히 바라보며 그 물결 속에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강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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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억 이미지와 달리 사사적 내면성이 없다. 주어진 것을 내면화하지 않은 채로 묘사한다. 사진은 의도하는 바가 없다.
존 버거의 사진에 대한 책을 읽고.. 사진 또한 서사적 내면성을 가질 수 있다. 단순히 모사하는 건 회화적 사진의 경우이고 상황을 포착해 사건을 담은 사진은 의미를 가진다. 즉, 서사적 내면성을 포하며 의도하는 바가 생기게 된다. 위 문장은 너무 뭉뚱그려서 설명한 거고, 디테일하게 말하지 못한 부분.
반면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벤야민은 사물을 자신에게 머무른 시선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럼으로써 사물은 시선을 가진 상태가 된다. 시선은 사물을 빛으로 감싸는 아우라를 가진 베일을 직조해 낸다. 아우라는 곧 바라보는 대상에서 생겨난 시선의 거리다.
벤야민의 말이 멋있다. 내가 사물에게 아우라를 만들어 준다는 거고, 이 사물의 아우라는 나의 시선으로부터 생겨났다는 말인데, 난 요즘에 그 사물을 사물 자체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 이 말을 빌려서 내가 요즘 노력하는 건 사물의 아우라를 만들어주려는 그런 시도가 아닐까, 하고 거창하게 말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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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시선이 사라져갈 때 신비로움과 아우라를 읽는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를 바라보지도 말 걸지도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그대가 아니며 그저 침묵하는 그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세계와의 시선 교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작)가 떠올랐다. 소설에서는 사랑을 받을 때 사람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한 사람이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마치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반짝거리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을수록 빛의 세기가 강해진다. 그래서 연예인들은 그렇게 빛이 나는 거라고. 표현은 다르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같은 게 아닐까. 결국 내가 바라보는 대상, 내 시선으로 아우라가 생긴다는 거고, 특히 내가 사랑 어떤 대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면 그 대상에 사랑의 아우라가 생긴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다.
83 정보는 언어의 극명한 수축 단계다. 정보의 쓰나미는 서사적 내면성을 파괴한다. 사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쌓아올려질 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된다.
84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한계, 과정, 역치가 신비로움을 만든다. 완결성, 통일성 맥락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한계 안에서 나아가는 여정과 관련이 있다. 이야기의 끝이란 잠정적 점들이 하나로 모이는 마법적인 지점 즉 독자가 처음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던 사물이 종국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고전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86 전부 모든 것이 가시적으로 변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꿈꿀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비를리오는 이렇게 답한다. “눈이 멀기를 꿈꾸지 않을까요?”
94 스마트폰은 타자가 자기 자신을 알리는 시선을 완전히 앗아감으로써 실제와 우리(나)사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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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 삶이 정보가 됐으며 다시 서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서사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방향성을 가진다. 정보는 하나의 장면이며 연속성이 없고 끊겨있다. 기억은 시간적 거리감이 있고 선택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서사적이며 기록은 모든것이 빠짐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보의 특성을 가진다. 현대 사회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는 찰나의 정보로 가득하다. 그 속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으므로 자신만의 철학을 쌓기 어렵다. 파편화된 정보가 아닌 하나의 서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맥락속에 존재할 수 있다. 즉, 진정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의 시대에는 사진에, 싸이월드의 시대에는 싸이월드에, 페북의 시대에는 페북에, 인스타의 시대에는 인스타에, 그리고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오던 시기에는 출판에 대한 철학자들의 분석이 있었겠지? 누군가는 사용하고 누군가는 머리터지게 분석한다. 그리고 대다수는 여전히 잘 사용하고 다음 기록방식으로 넘어간다. 그 점이 나는 너무 웃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