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글
공항은 국경을 넘어서 다른 시공으로 우리를 데려가주는 가장 확실한 관문입니다 인위적으로 시차를 경험하고 노독을 겪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경계이기도 합니다. … “공간에 의한 시간의 이상한 오염, 장거리 이동이 시간과 공간을 전복시키는 변질.”
우리의 육신을 그 근본으로부터 떼어내어 타지로의 이동보다는 오직 생소한 시공에 틈입하기 위해 공항의 잠재적 위험과 사소한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 께다.
임자혁
삼층집
…
이층은 텅 비어있어요.
꽉 찬 감정들 사이에 불어오는 공허함이
위층과 아래층 사이를 메웁니다.
우리가 만났다가 이윽고 헤어지는 것 사이에 공허함이 있을까요? 우리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 사이에 공허함이 있을까요?
삼층으로 떠났다가 일층으로 돌아오기 마련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이는
텅 빈 이층 어딘가에서 사라진 것이 틀림 없어요.
작가의 공항 드로잉이 좋다. 특정 장소 속 사물에서 떠오르는 생각, 또는 사물의 변형. 예를들어 게이트 가이드 라인을 엉켜놓는다든지. 드로잉으론 뭐든지 할 수 있다.
안규철
변신
내가 있는 장소에 따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의해 일관되고 연속성 있는 방식으로 변한다. 이것은 나의 내면에 변치않는 어떤 본성이나 의지가, 아니면 적어도 일관되고 연속성있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고유한 인격적 체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다.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가 거인이 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비행기 여행은 고도로 추상화된 여행이다. 그 여행은 정해진 좌석에 결박된 몸으로 한두 차례 기내식을 받아먹으며 잠이 들거나 헐리웃 영화 몇 편을 연속해서 보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 시차는 그중 가장 사소한 것에 속한다. 수천 킬로미터의 물리적 거리가 압축되는 이 폐쇠공간 속에서 잠깐 새우잠을 자는 사이에 여행자는 완전히 다르사람으로 변신한다. 공항은 이러한 마법의 바다로 나가는 항구다.
사물의 이름
공항을 통과하는 모든 사물은 검색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공항에서 사물들은 가급적 분명한 이름이 있는 것이 좋다. 이름이 없다면 적어도 용도가 무엇이고 어떤 범주에 드는 물건인지가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에는 이렇게 분명한 물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 여러 개의 이름이 있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비교할 사례가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세상에 없었던 것, 아무도 모르는 것, 언어 바깥에 있는 것, 침묵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오히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항을 통과하기 어렵다. 이름이 없고 분류가 곤란한 것들은 위험물이나 마약류, 금지물품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
공항은 SF영화 속의 스페이스 쉽처럼 바깥의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불확실성을 허용할 수 없는 인공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많은 것들은 이 세계에서 추방된다. 그러므로 예술이 언어 너머의 세계를 다루고 경계를 무너뜨리고 대립적인 것들 사이의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공항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예술가의 영감의 원천이다.